소나기가 내린 뒤 젖은 땅에 발이 푹푹 빠졌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는데도 기자의 검은색 운동화는 금세 흙 범벅이 됐다. 반면 발목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를 신은 송인택(60) 한국꿀벌생태환경보호협회 이사장은 나무와 풀로 뒤덮인 산을 거침없이 올랐다. 그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울시 서초구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송 이사장은 평일에는 변호사로 일하고, 주말에는 밀원수를 심고 꿀벌을 돌본다. 그가 조성하는 밀원숲은 33만㎡(10만평)에 달한다. 2019년 울산지검장을 끝으로 24년간의 검사생활을 마무리한 송 이사장은 어떻게 나무 심는 사람이 됐을까. 지난 7월 21일 충북 영동군 학산면에 위치한 꿀벌목장 시범단지에서 송 이사장을 만났다. 기자를 발견한 그는 멜론맛 막대 아이스크림 마지막 한 입을 먹고는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손이) 조금 끈적끈적할 수 있어요.” 자연에서 본 그는 영락없는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꿀벌 곁으로 간 은퇴한 검사인사를 나눈 송 이사장은 곧바로 나무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이건 닭백숙에 들어가는 엄나무예요. 1m 높이로 자라서 이제 꽃이 피려고 합니다.” “이건 큰잎유럽피나무. 꽃이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피죠.” “이건 옻나무랑 비슷하게 생긴 소금나무인데 열매에서 짠맛이 나요.” “이건 헛개나무. 여기 초록색의 열매 보이나요. 2018년에 심었는데 이건(햇빛이 잘 드는 곳에 심은 나무) 꽃이 피고, 저쪽에 심은 헛개나무는 꽃이 아직 안 폈어요.” “이건 옥시덴드론인데 장마철에 거꾸로 늘어져서 꽃이 피기 때문에 밀원성이 좋아요. 꽃이 위를 향하게 피면 빗물에 꿀이 씻겨나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래를 향해 피면 안 씻겨나가죠.” 나무에 대해 설명하는 그는 한껏 신나 보였다.“꿀벌 학대가 꿀벌 실종사건 불렀다”나무가 과수원처럼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을 것이란 기자의 예상과 달리 밀원수는 경사진 산에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다. 기자 혼자 살펴봤다면 어떤 것이 밀원수이고 어떤 것이 원래 산에 있던 나무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송 이사장은 산 곳곳을 돌아다니며 밀원수를 감싸며 올라온 칡넝쿨을 뜯어내고, 가지치기용 전지가위를 이용해 나무의 곁가지를 잘라냈다. 기자가 “(가지를) 이렇게나 많이 자르느냐”고 묻자 그는 “다리에 뭐가 잔뜩 매달려 있으면 뛰는 데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무가 위로 잘 자라기 위해선 곁가지를 쳐야 한다는 뜻이다.“회사에서 바로 운전해서 오면 3시간20분 정도 걸립니다. 빵과 우유를 먹으면서 오면 밥 먹는 시간이 절약되죠. 옷은 출근할 때 미리 챙겨놓고 여기 와서 갈아입어요. 오후 3~4시 사이에 도착하면 봉(蜂)사로 올라가서 벌이 잘 있는지 한번 보고, 산에 심어놓은 나무들도 살핍니다. 10만평이나 되기 때문에 다 둘러볼 수는 없어요. 그때그때 되는 대로 하는 거죠.”송 이사장은 어떻게 꿀벌과 밀원수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 “쉰이 되던 해 은퇴하면서 뭘 할지 생각하다가 ‘내가 꺾어진 지 오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법 가지고 평생 먹고살았으니까 65살까지는 변호사로 일할 텐데 그다음에는 무얼 할지 고민했죠. 제가 원래 둘째 아들이어서 농사를 지었어야 했는데 공부를 했어요. 그래도 어릴 적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왔기 때문에 자신 있었죠. 고등학교 때까지 지게 지고 다녔거든요. 힘든 것은 싫으니 ‘나무나 좀 심어서 열매를 따자’ 한 게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꿀 한 번 먹여보자’가 됐죠. 해보니까 여름 장마 이후로는 꿀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설탕물을 먹이지 않으면 굶어죽겠더라고요. 하지만 설탕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죠. 꿀벌들이 사계절 내내 먹을 꽃이 있어야겠다 싶어서 밀원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그가 말하는 설탕꿀은 곧 사양꿀이다. 송 이사장은 기자에게 “사양꿀이 뭔지 아시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다수는 잘 모른다”며 “꿀벌에게 설탕물을 먹여 만든 꿀”이라고 스스로 답했다. “저는 사양꿀을 설탕꿀로 불러야 한다고 봐요. 유채꿀, 아카시아꿀, 밤꿀 다 원재료의 이름을 붙이는데 왜 사양꿀만 사양(飼養)해서 만든 꿀이라고 하는지 이상해요.” 그는 “2020년부터 사양꿀이 법제화되면서 일부 사양꿀 업자들이 사양꿀을 마구 양산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우리나라는 2020년부터 시행된 ‘양봉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통해 사양꿀도 벌꿀로 인정했어요. 그런데 꿀벌 집단 실종 사건은 2021년부터 발생했죠. 이는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진실입니다. 설탕물을 먹이고 일하라는 건 꿀벌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꿀벌은 꽃에서 꿀을 따면서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40일도 못 살고 겨울에 실종되는 거예요. 날씨가 따뜻해 추위가 늦게 오면 사양꿀을 늦게까지 생산하기 때문에 꿀벌 폐사 피해가 커질 수 있어요.”
송인택 이사장의 꿀벌목장 시범단지 안에 위치한 봉사. photo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사양꿀은 시장에서 퇴출시켜야”실제로 지난 5월 18일 그린피스와 안동대학교 산학협력단이 발표한 ‘벌의 위기와 보호 정책 제안’ 보고서는 “벌의 먹이가 되는 밀원식물은 빠르게 줄어드는 반면에 꿀벌의 사육 봉군(벌떼) 밀도는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국립산림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전체 밀원 면적은 1970~1980년대 대비 약 70%(47.8만→14.6만㏊)가 감소했다. 사라진 밀원 면적은 제주도 면적(18만4900㏊)의 약 1.8배이며, 여의도 면적(290㏊)의 약 1145배에 달한다. 보고서는 “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소 30만㏊의 밀원면적이 필요하다”며 “밀원식물의 종류를 다채롭게 구성해 다양한 벌이 연중 내내 꿀을 구할 수 있도록 밀원수림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보고서의 진단과 해결방법은 송 이사장의 생각과 맞물린다. 그는 꿀벌 집단 실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사양꿀을 시장에서 퇴출하고 밀원수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 “3월부터 9월까지 꿀벌이 먹을 수 있는 꽃이 계속 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3월에는 회양목·설탕단풍, 4월에는 산벚나무·왕벚나무, 5월은 아까시나무, 6월에는 찰피나무·참피나무·큰잎유럽피나무·토멘토사피나무, 7월에는 엄나무·쉬나무, 8월에는 칠자화·산초나무·오갈피나무, 9월에는 헨리아나피나무 등 개화기에 맞춰 다양한 밀원수를 심어야 해요.” 그가 지금까지 심은 나무는 5만 그루가 넘는다. 송 이사장은 “꿀벌이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때에도 설탕물을 주는 대신 저장해둔 꿀을 주기 위해 실험하고 있다”며 “꿀벌이 먹고 남는 것만 채취하는 양봉, 즉 100% 천연의 상태에서 꿀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송 이사장이 처음부터 밀원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주말이나 평일 퇴근한 후에 인터넷 검색창에 honey(꿀)와 flower(꽃)를 검색해서 꿀이 나오는 식물을 찾아봤다”고 했다. “내 평생 그때 영어공부를 최고로 많이 한 것 같아요. 해외 논문을 읽으면서 밀원수에 언제 꽃이 피는지, 어떤 밀원수에서 꿀이 많이 나오는지 공부했죠. 검색해도 안 나오는 것들은 내가 해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비교적 잘 자라고, 꿀이 많이 나온다는 나무를 구해서 직접 심었죠. 지금은 어떤 나무가 밀원수로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하고 있어요. 외국과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안 얼어 죽는지, 꽃은 얼마나 오래 피는지, 벌들이 꽃에 많이 모이는지 이렇게 3가지를 확인하려는 거예요.”그는 이렇게 다양한 밀원수를 심고 관찰한 결과를 꾸준히 ‘텃밭 일기-송인택 변호사가 꾸미는 텃밭 이야기’라는 블로그에 기록한다. “같은 날에 같은 종류의 나무를 심어도 거름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성장 속도가 다릅니다. 물기가 많은 곳에서 사는 나무도 있고 물을 싫어하는 나무도 있죠. 이런 것은 직접 심어 봐야 압니다.” 송 이사장은 “사람 기억력이 안 좋다”며 “그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글을 쓴다”고 했다. 그의 학구열과 꼼꼼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송 이사장은 자신이 죽기 전에 온 세상이 같이 움직여서 100억그루의 밀원수를 우리나라에 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제 꿈은 우리나라에서 70% 정도를 차지하는 사유림의 약 30%를 밀원숲으로 만드는 거예요. 산주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려면 산주가 꿀벌 목장을 조성해서 임대 수입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럼 숲은 농약을 안 치는 친환경 숲이 되고, 후손들에게도 물려줄 수 있고, 꿀벌들에겐 먹이 천국을 만들어줄 수 있죠. 사람도 꿀벌도 모두 이득을 보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나라 사유림 정책의 근본을 바꾸고 싶습니다.”
송인택 이사장이 자신이 키우는 벌집을 들어 보이고 있다. photo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사람 몸은 육체노동하라고 만들어졌다”
송 이사장의 오랜 친구인 한국꿀벌생태환경보호협회 김성렬 이사는 기자에게 “(송 이사장은) 여기 오는 거 생각하면 목요일부터 즐겁다고 한다”고 전했다. 기자가 송 이사장에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묻자, “궁금하잖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잡초가 무성한 관리사 비닐하우스 입구를 바라보며 “지난주만 해도 안 이랬다. 일주일 만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여기 오려고) 금·토요일은 절대 약속을 안 잡죠. 그래서 남들하고 잘 못 어울려요.”
그는 “사람 몸은 원래 책상에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육체노동 하라고 만들어졌다”면서 이런 철학도 피력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팬티까지 쫄딱 젖을 정도로 운동·노동을 해야 합니다. 일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오전까지는 서초동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밤까지는 여기서 일하죠. 낮에는 파란 풍경이 펼쳐져서 좋고, 밤에는 소쩍새 소리밖에 안 들려 평화롭습니다. 이렇게 지내고 출근하면 월요병도 없어요. 정치한다고 깔짝거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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